공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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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 公)씨는 중국한국의 성씨이다.

구멍 공 孔[편집]


(孔)씨는 중국의 공자(孔子)의 가계를 원류로 하는 성씨로 한국인에게는 귀화한 성씨가 된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5,969가구, 83,164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56위이다. 본관은 창원(昌原)‧파평(坡平)‧수원(水原)‧부평(富平)‧남양(南陽) 등 45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1794년(정조 18년) 국왕 조선 정조의 명으로 곡부 공씨(曲阜 孔氏) 단본(單本)으로 되었다.

공자의 53세손인 공완(孔浣)의 둘째 아들 공소(孔紹)가 원(元)나라 순제(順帝)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는데, 1351년(고려 공민왕 즉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여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였다. 이후 문하시랑평장사(文下侍郞平章事:내사문하성의 정이품)로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지고 관향을 창원(昌原)으로 사적(賜籍) 받음으로써 창원 공씨(昌原 孔氏)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 공소(孔紹)의 초명은 소(昭)였는데, 고려 광종의 이름과 같아 피휘(避諱)하여 소(紹)로 고쳤다고 한다.

공소의 아들 공여(孔帤)는 고려 말에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 평장사(平章事)와 지응양군천우위대장(知鷹揚軍千牛衛大將) 등을 지냈다. 공여의 큰아들 공부(孔俯)는 고려 때 집현전태학사, 평장사 등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한 뒤 한성판윤(漢城判尹),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공여의 둘째 아들 공은(孔㒚)은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후손들은 고려조선시대 창원 공씨로 세계를 이어오다가, 1794년(조선 정조 18년) 국왕 정조의 명으로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개관(改貫)하게 되었다.[1] 곡부 공씨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8명, 무과 급제자 25명을 배출하였다.

공평할 공 公[편집]

(公)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741가구, 2,442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50위이다. 본관은 김포 단본이다.

김포 공씨(金浦 公氏)의 시조 공윤보(公尹輔)는 당 현종안녹산의 난을 피하여 755년(신라 경덕왕 14년)에 신라에 들어와 김포에 터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1478년(조선 성종 9년) 계공랑(啓功郞)으로 김포 천능사건으로 인하여 왕에게 직간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평안도 벽동(碧潼)으로 강제 이거 당한 공명례(公明禮)가 벽동파(碧潼派)의 파조가 되고, 세조 때 불복신(不服臣)으로 몰려 함경도 문천(文川)으로 유배된 공보언(公普彦)가 문천파(文川派)의 파조가 되었다.[2]

바칠 공 貢[편집]

(貢)씨는 고려조선시대에 있었던 성씨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인천(仁川)이 전하며 수원 공씨의 시조는 고려 후기의 문신 공천원(貢天源)이다. 인천 공씨는 조선 중종(中宗) 때 진사 공세영(貢世瑛)이 있었다.

기타 중국의 공씨[편집]

  • 공(共:鞏)씨는 공공씨에서 나온 성씨이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공족이 공씨로 창성하였다. 전국시대 정나라, 위나라 파생된 공씨가 있다.
  • 공(巩)씨는 주나라소수민족 창족 계통으로 거의 사라진 성씨이다.
  • 공(功)씨는 제나라, 송나라, 몽골족 성씨이다.
  • 공(貢)씨는 초나라 계통 성씨라고 한다.
  • 공(公)자로 시작하는 복성 공고(公古), 공맹(公孟), 공염(公冉), 공덕(公德), 공손(公孙), 등 대략 60개 정도의 성씨가 고대 부터 있어 왔는데, 공씨로 줄였다.

각주

  1. 곡부 공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포 공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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