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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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 襄) 또는 (梁, 樑)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들보 량 梁[편집]

한국[편집]

한국 (梁)씨의 기원은 탐라개국설화에 등장하는 양을나(良乙那)에 두고 있다. 양(梁)씨는 본래 (어질 량)씨였는데 양탕(良宕)이 신라 진흥왕에게 (들보 량)씨를 사성 받았다고 한다. 양(梁)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389,152명으로 조사되어,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25위이다.

  • 제주 양씨(濟州 梁氏)의 시조는 탐라개국설화에 등장하는 양을나(良乙那)이다. 양을나의 후손 양탕(良宕)은 559년(신라 진흥왕 20년)에 사신으로 신라에 방문하여, 진흥왕에게 양(梁)씨 성을 사성받았다. 그의 후손 양순(梁洵)이 682년(신문왕 2)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졌다. 제주 양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명을 배출하였다. 인물로는 양팽손(梁彭孫)이 1519년 기묘사화로 삭직되었다가 복관되어 현령을 지냈고, 양팽손의 아들 양응정(梁應鼎)은 선조 때 공조참판·대사성을 지냈다. 2000년 인구는 133,355명이다.
    • 남원 양씨(南原 梁氏) 중시조 양우량(梁友諒)이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공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제주 양씨에서 분적하였다고 한다. 문헌의 실전으로 선계를 상고할 수 없어, 양능양(梁能襄), 양주운(梁朱雲), 양수정(梁水精) 을 각각 1세조 하여, 병부공파, 용성군파, 대방군파로 나뉘었다.[1] 고려시대 인물로는 현종 때 예부상서 ·좌복야 ·상서좌복야 등을 역임한 양진(梁稹), 공민왕 때 개성윤(開城尹)으로서 흥왕사(興王寺)의 변에 공을 세워 1등공신에 오르고 우왕 때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에 오른 양백익(梁伯益)이 있다. 남원 양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6명을 배출하였다.[2] 조선시대 인물로는 양성지(梁誠之)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 ·공조판서를 거쳐 좌리공신에 오르고 대사헌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양성지의 손자 양연(梁淵)은 중종 때 공조참판·대사헌·좌승지·병조판서·이조판서·우참성·좌찬성·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2000년 인구는 218,546명이다.
    • 충주 양씨(忠州 梁氏) 중시조 양능길(梁能吉)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에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중삼한대장군(三重三韓大將軍)으로 국가의 대업을 이룩하여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지자 제주 양씨에서 분적하였다.[1][3] 충주 양씨는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하였는데, 인물로는 조선 세종 때 병조정랑을 지낸 양여공(梁汝恭)이 있다.

중국[편집]

중국 (梁)씨는 약 1800만명으로 중국 성씨 인구 순위 20위이다.

버들 양 楊[편집]

한국[편집]

(楊)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3,416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55위이다. 역사 인물로 고구려 보장왕 때 안시성(安市城)의 성주(城主) 양만춘이 있는데 17세기 간행된 동춘당선생별집, 열하일기에 楊萬春, 또는 梁萬春으로 다르게 기록하여 양(楊)씨인지 분명하지 않고, 삼국사기에는 출자가 없어,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현재 양만춘을 시조로 하는 본관은 없으나, 선계 미상의 본관이 다수 존재한다. 685년(신라 신문왕 5년)에 고구려 유민을 남원으로 집단적으로 이주시키고 남원경을 설치하였다. 남원경에서는 고구려 유민을 통하여 왕산악(王山岳)의 거문고가 신라에 전해졌으며, 남원에서 고구려 문화가 계승되었다.

  • 중화 양씨(中和 楊氏)의 시조 양포(楊浦)는 고려 고종 때 정승(政丞)을 지냈으며 나라에 공을 세워 당악군(唐岳君)에 봉해졌다. 당악은 평안남도 중화군(中和)의 옛 지명이다. 중화 양씨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명을 배출하였다. 인물로는 양희지(楊熙止)가 1474년(성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한성부우윤을 역임했다. 2000년 인구는 5,468명이다.
  • 남원 양씨(南原 楊氏)의 시조는 고려시대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을 역임한 양경문(楊敬文)이다. 그러나 2세부터 5세까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낸 양이시(楊以時)를 중시조로 삼는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제용재기(濟用財記)』에서도 양이시는 남원사람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남원 양씨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8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52,197명이다.
  • 청주 양씨(淸州 楊氏) 시조 양기(楊起)는 원나라에서 공민왕의 비 노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왔다. 청주 양씨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하였다. 인물로는 양사언(楊士彦)이 있다. 2000년 인구는 27,437명이다.
    • 안악 양씨(安岳楊氏) 시조 양만수(楊萬壽)는 청주양씨 시조 양기(楊起)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때에 전서(典書)를 지냈고 안악군(安岳君)에 봉해졌다. 2000년 인구는 355명이다.
    • 밀양 양씨(安岳楊氏) 시조 양근(楊根)은 청주양씨 시조 양기(楊起)의 다섯째 아들이다. 밀양 양씨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4,477명이다.
  • 통주 양씨(通州楊氏)의 시조 양복길(楊福吉)은 원래 중국 통주(通州) 사람이다. 그는 명나라 9의사(義士)의 한 명으로 나라가 망하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와서 북벌(北伐)을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조선에 귀화해서 정착해 살았다. 후손들이 선조의 고향인 통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2000년 인구는 83명이다.

중국[편집]

중국 (楊)씨는 약 4천만명으로 중국 성씨 인구 순위 6위이다. 양(楊)씨의 기원은 중국 홍농 사람 당숙우(唐叔虞)의 후손 백교(伯僑)가 주나라로 들어가 양후(楊候)에 봉해진 것에서 비롯되었다. 저족, 막호로(莫胡蘆)족, 양(揚)씨에서 개성한 양씨가 있다. 양(楊)씨는 중국 소수 민족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씨이다.

들보 량 樑[편집]

(樑)씨는 현대에 창설된 성씨로 시조와 연원은 알 수 없다. 196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온 성씨로 당시에 16명이 있었다. 본관은 남양(南陽) 단본이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57가구, 3,211명으로 조사되었다.

도울 양 襄[편집]

(襄)씨는 본관과 연원을 알 수 없다. 조선씨족통보에 주나라 때 장공의 아들 양중이 시호를 성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언제 누가 동래하였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襄)씨는 토착 성씨인지, 동래 성씨인지 고증할 수 없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63가구, 823명으로 조사되었다.

각주

  1. 1.0 1.1 양씨중앙종친회.
  2. 남원 양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3. 다음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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