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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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 또는 (余, 汝)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음률 려 呂[편집]

(呂)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56,692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63위이다.

본관은 문헌에 30여 본이 전하고, 현존하는 본관은 함양(咸陽), 성주(星州), 함흥 등 18본으로 조사되나, 대본인 함양 여씨성주 여씨(성산 여씨)의 세거지(世居地)로 보인다.

  •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시조 여어매(呂禦梅)는 당나라 한림학사(韓林學士)로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을 때 신라로 귀화하였다고 한다. 이후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에 정착하고, 고려시대 전서(典書)를 지냈다. 그 뒤에 함양, 성주, 밀양, 김해(金海) 등 4본으로 분적했다고 하나, 중간에 보판(譜板)을 잃어버려 그 세차(世次)를 확인할 수 없다. 여어매는 여임청(呂林淸)과 여광유(呂光有) 형제를 두었는데, 여임청의 후손인 여자장(呂子章), 여존혁(呂存赫) 형제와 여광유의 후손들이 함양(咸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1] 여어매의 9대손인 여칭(呂稱)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 조선 태조 때 도총제(都摠制)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청빈하기로 이름났다. 그의 증손 여자신(自信)은 성종~중종대에 걸쳐 이름난 무신으로 병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함양여씨는 칭의 8대 손인 여우길(呂祐吉)·여유길(呂裕吉)의 대를 고비로 선조~숙종대에 걸쳐 가장 위세를 떨쳤다. 여우길(呂祐吉)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광해군 때 관찰사에 이르렀는데, 대명외교(對明外交)에 공헌하고 임진왜란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 중단된 국교를 회복시켰다. 독립운동가 여운형(呂運亨)은 여우길의 11대손이다. 여유길(呂裕吉)은 선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 광해군 때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여유길의 아들 여이징(爾徵)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 대사헌·도승지·부제학 등을 지냈는데 성리학에 밝고 천문·역법(曆法)·시문·서화에도 뛰어났다. 또 그의 종제(從弟) 여이재(呂爾載)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심기원(沈器遠)이 모반했을 때 공을 세워 영국공신(寧國功臣)에 책록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상신 여성제(呂聖齊)는 소론(少論)의 한 사람으로서 영의정에 이르렀다가, 남인(南人)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소(辭疏)를 올린 끝에 중추부판사로 전임하였다. 2000년 인구는 25,667명이다.
  • 성주 여씨(星州呂氏)의 시조 여양유(呂良裕)는 고려시대에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냈다. 여양유의 아들 여위현(呂渭賢)은 고려시대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공조판서를 지낸 여극회(呂克誨)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5세손 여문승(呂文承)이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면서 성주 여씨를 중흥시켰다. 중종 때의 유생으로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낸 여희림(呂希臨)은 현량과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성주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선조 때 군수를 지낸 여대로(呂大老)는 청백리에 피선되었다. 이밖에 조선 말기 의병장으로 전라북도 임실군의 대운치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여주목(呂株穆)과 북간도에서 이동녕(李東寧)·이상설(李相卨)과 함께 서전의숙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쓴 독립운동가 여준(呂準) 등이 있다. 성주 여씨(성산 여씨)의 2000년 인구는 18,808명이다.

나 여 余[편집]

(余)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8,146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94위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단본이다.

여(余)씨의 기원은 백제의 왕족인 부여(扶餘)씨에 둔다. 중국(中國)의 수서(隨書) 송서(宋書)와 일본서기(日本書記)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 편에 백제(百濟) 말기 의자왕의 왕자(王子)를 여풍장(余豊璋), 왕숙을 여충신(余忠信), 정승(政丞)을 여의수(余宜受)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와 송서 백제전(宋書百濟傳), 일본서기(日本書記) 등에 백제(百濟)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하여 패망한 후 왕후장상(王候將相) 1만2천여명이 당장 소정방에게 피납되어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백제촌(百濟村)을 이루어 살았고, 일본(日本)에 볼모로 있든 왕자(王子) 여풍장(余豊璋)은 복국운동(復國運動)이 실패로 돌아가자 복흥군(復興軍)과 함께 고구려(高句麗)로 피신하였다는 기록과 그 뒤 부왕(父王)이 왕족 일행과 군거하는 당(唐)나라의 백제촌(百濟村)으로 잠입(潛入) 합류(合流)하여 후일을 기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의령 여씨 문중에 따르면, 백제 왕자 여풍장(余豊璋)의 후손 여선재(余善才)가 고려 때 환국하였다고 전한다.

의령 여씨(宜寧余氏)의 시조 여선재(余善才)는 송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다. 그가 1103년(고려 숙종 8) 송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그를 의춘군(宜春君)에 봉하였다고 한다. 의춘은 의령(宜寧)의 옛 지명이다. 여선재의 아들 여영후(余英候)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여현경(余玄景)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루고 있다. 9세손 여중부(仲富)가 고려 말에 호부전서를 지냈고, 10세손 여흥렬(興烈)은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지냈다. 11세 여원경(元暻) 숙천(肅川)목사 ·안주진병마절도사, 여건(健)은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의령 여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가 3명을 배출하였는데, 사간원정언을 지낸 여효온(孝溫), 현감 ·직강을 역임한 여상규(尙珪), 봉상시첨정을 지낸 여후(垕) 등이다. 현대 인물로는 국회의원 여상규가 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7,474명, 1985에는 3,555가구, 14,733명, 2000년에는 18,146명으로 조사되었다.

너 여 汝[편집]

여(汝)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358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안산(安山) 단본이나, 시조와 유래는 알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당시 서울에 1가구, 경북 김천군에 1가구, 강원 회양군에 1가구 도합 3가구가 있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23명, 1985년에는 122명, 2000년에는 358명으로 조사되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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