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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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서 20,635명으로 조사되었다.

연원[편집]

『좌씨전(左氏傳)』과 『계고집성(稽古集成)』에 중국 정(鄭)나라 (穆)의 증손 가운데 인단(印段)이 조부의 이름인 ‘자인(子印)’의 (印) 자를 따서 성씨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교동 인씨[편집]

교동 인씨(喬桐 印氏)는 강화군 교동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진(晉)나라 풍익대부(馮翊大夫) 인서(印瑞)가 300년(신라 기림왕 3년) 신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였다. 그의 33세손인 인빈(印份)이 고려 인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에 봉해졌다.[1] 교동은 현재의 강화군 교동면이다. 인빈의 아들 인완(印完)은 형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에 올랐으며, 손자 인규(印珪)는 판이부상서를 역임했다. 증손 인현원(印玄元)은 응양위 대장군을 거쳐 호부상서를, 현손 인정(印貞)은 평장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인빈의 9세손 인당은 공민왕 때 서북면병마사로 참지정사에 올랐으며 석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인안(印安)이 전리 판서를, 인해(印海)가 이부시랑을 지냈다. 손자 인원보(印原寶)가 서북면 체찰사, 인중보(印重寶)가 상장군을 각각 역임했다. 교동 인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 무과 31명, 사마시 5명을 배출하였다. 대장군을 지낸 인저(印著)와 절충장군 인철관(印鐵寬), 선략장군으로 임진왜란 때 정난원종 이등공신에 오른 인발(印潑), 도총부 부총관 인이헌(印以憲), 참판을 역임한 인명조(印明朝), 인근영(印瑾永), 인석신(印錫信), 인상혁(印相赫) 등이 가문을 빛냈다. 2000년 인구는 5,403가구, 17,448명이다.

연안 인씨[편집]

연안 인씨(延安 印氏)의 시조는 인후(印侯)이다. 인후는 몽골 사람으로 본명은 훌라타이(忽刺歹)이다. 인후는 1275년(고려 충렬왕 1년)에 충렬왕의 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다. 인후라는 이름은 당시의 고려 대장군 인공수(印公秀)와 친하여 그의 성을 빌려 쓴 것이라고 한다. 인공수는 교동 인씨이다. 인후는 1309년(충선왕 1) 평양군으로 봉해지고 자의도첨의사사가 되었으며 검교정승을 지냈다. 아들 인승단(印承旦)이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연안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연안으로 하였다.[2] 연안은 현재의 황해남도 연안군이다. 문과 급제자로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16년(1290) 경인(庚寅) 경인방(庚寅榜) 동진사(同進士)로 문과에 급제한 인승광(印承光)이 있다. 2000년 인구는 164가구, 588명이다.

인물[편집]

  • 인공수(印公秀) : 고려 대장군
  • 인후(印侯) : 고려 때 몽골에서 귀화한 장군
  • 인승단(印承旦, ? ~ 1356년) : 고려 후기 문신. 좌정승,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 인당(印璫, ? ~ 1356년) : 고려 무신. 첨의평리(僉議評理),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참지정사(參知政事)
  • 인해(印海) : 고려 후기 무신.
  • 인원보(印原寶, ? ~ 1388년) : 고려 말 문신.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 인태식(印泰植, 1902년 ∼ 1975년) :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 인교진(印喬鎭, 1980년 ~ ) : 배우

각주

  1. 교동 인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2. 연안 인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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