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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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한국사의 시대 구분

국가 정보
국호 대조선국(大朝鮮國)
영토
파일:1726년조선.png
서력 1726년(영조 2년)의 조선 영토와 주변국을 나타낸 지도이다.
존속기간 음력 서력 1392년 7월 17일~서력 1910년 7월 25일(518년 8일)
양력 서력 1392년 8월 5일~서력 1910년 8월 29일(518년 24일)
성립 이전 고려왕조
멸망 이후 일제 강점기

개요[편집]

조선(朝鮮)은 1392년부터 1897년까지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통치하였던 왕조이다. 공식 명칭으로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으며, 때로 대조선국(大朝鮮國)이라는 명칭을 어보(御寶), 국서(國書) 등에 사용하였다. 흔히 조선왕조(朝鮮王朝)라고 부르며, 일제 강점기에는 이씨조선(李氏朝鮮)이라고도 불렀다. 1392년 고려왕조의 뒤를 이어 이성계가 건국한 나라이다. 1897년부터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조선이라는 국호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조선이라는 이름을 쓴 왕조는 역사상 두 개이나 여기서는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를 다룬다. 국호의 유래는 고조선이다. 그리고 고대국가였던 조선은 고조선 항목을 참조.

고려 말기 신진사대부의 지원을 받은 이성계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이후 500여 년 동안 존속됐다. 조선은 유교에 의한 통치 이념을 기본으로 임금과 신하에 의한 치를 중요시했다. 조선이 통치하는 동안 한반도에서는 한글의 창제와 과학 기술 및 농업 기술의 발달 등이 이루어졌으며,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외침을 극복하고, 현재의 한민족과 한국 문화의 직접적 전통의 기반이 되는 문화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은 사실상 이민족한테 거의 시달리지 않았던 왕조이기도 하다. 일단 조선시대에는 전반적으로 왜구의 침입이 그 전왕조인 고려에 비해 드물었다.조선이 왜구의 침입을 몇 번 받았기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1]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에는 아예 왜구한테 침입당하지도 시달리지도 않았으므로 조선은 양난 이후 250년이 넘는 기간 내내 평화를 누렸다. 또한 15세기 중반부터는 왜구의 침입 자체가 꽤 드문 사건이었다.[2]또한 17세기부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해적금지령으로 인해 왜구 자체가 사라져서 조선이 왜구한테 시달리는 일도 더 이상 없었다.그러므로 조선이 500년 내내 왜구한테 시달렸다는 주장은 거짓말에 불과하다.[3] 간혹가다 17세기이후에도 왜구가 존재했으며 왜구는 해적이므로 조선을 침입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왜구 자체는 확실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해적금지령으로 인해 사라졌다.실제로 15세기 중반부터는 황산대첩과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의 영향때문인지 16세기까지 왜변이 몇번 없었다.즉,오히려 조선은 왜구한테 시달리지 않았던 기간이 많았고 길었다.조선시대에도 왜구침입은 있었지만 보통 사이에 2~30년의 간격,길게는 60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났다.

역사[편집]

조선 전기[편집]

임진왜란병자호란[편집]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을 침공한 전쟁이다. 전쟁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나눠지는데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명나라는 일본과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었고 일본이 다시 한번 쳐들어 온게 정유재란이다.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 그리고 국호를 청으로 바꾼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전쟁이다. 조선은 청나라에 대군에 참패하였으며 청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게 되었다.

간혹가다가 조선이 화교왕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당연히 화교왕조일리가 없다.

붕당 정치[편집]

숙종의 환국정치로 건강한 붕당문화가 완전히 사라져 죽고 죽이는 개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세도 정치[편집]

정조 사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세도 정치가 시작된다. 어째 혜공왕의 대목이 떠오른다. 이는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의 결과로, 정조도 본인이 그렇게 일찍 죽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권력이 왕 1인에게 집중된 상황에서 어린 세자가 즉위함으로써 대리청정을 실시하는 왕후, 그리고 그와 연결된 외척(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을 꼽을 수 있다.)이 득세하여 횡포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상호견제라는 붕당이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1당, 아니 1가문 독재였다. 그 후 헌종, 철종의 치세 때에는 더욱더 격화되어 민중의 삶이 낙후되었다. 결국 전정, 군정, 환곡을 아우른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자 지친 농민들은 임술 농민 반란을 일으킨다.

이는 철종이 사망하고 즉위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많이 달라진다.

흥선대원군의 집권[편집]

갑오개혁 이후[편집]

역대 국왕[편집]

틀:조선의 왕

외우는 법[편집]

조선의 역대 국왕에 대해 외울 때, 앞글자를 따서 외우곤 한다.


산군
해군

모아서 쓰면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이 된다.

나리 나리 개나리~를 연상하자

평가[편집]

동시기 일본과의 비교[편집]

본격적으로 한반도와 일본열도간의 국력차가 역전된 시기로 평가된다.과거엔 '조선은 일본보다 정치, 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었는데 메이지유신으로 역전되었다' 라는 평가가 있었으나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만 봐도 이미 일본이 에도 막부 시절 네덜란드 등과 접촉하면서 난학을 발전시키고 문물이 발전하여 이런면을 통신사들도 배워야 한다고 느꼈던 부분이 있다. 심지어 일본의 우수한 문물은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의가 이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 초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 논의들을 살펴보면 종이, 안료, 무기, 광물지식, 화폐경제 등 제조업과 산업분야에서 조선보다 더 발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대표사례 물론 화약, 도자기나 기타 다른 문물은 조선이 일본을 앞선 경우도 존재했지만 임진왜란 이후엔 그마저도 우위가 사라졌다는 평가가 많다.

조선초에도 제법 격차가 있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양국의 질적 역전은 고려시대에 발생했을 소지도 충분하기에 이 문제를 조선의 문제로만 돌리기도 곤란하긴 하다. 전근대 농업사회의 국력에 결정적인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라는 면에서 이미 일본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인구면에서 한반도 국가를 압도하고 있었으며 그 절대치의 추월 시기는 통일신라 시기다, 가마쿠라 막부 초기다 등등 다양하나 일단 위 조선 초 일본인구는 한반도를 한참 능가한 시점이었다. 국토면에서도 일본은 혼슈 하나가 압록-두만 이남 한반도보다 약간 더 크고 규슈와 시코쿠 또한 만만치 않게 크다.

게다가 일본은 태평양에 바로 맞닿아 있고, 한반도보다 남쪽에 있어 기후가 훨씬 따뜻하고 강수량 역시 높다. 때문에 농업 부분에서도 당연히 한반도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17세기에 들어서야 정착한 모내기법 또한 일본에서는 풍부한 강수량 덕분에 이미 15세기 부터 전국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이미 조선시대 이전부터 일본은 큰 국토와 축복받은 기후 덕에 월등한 생산력을 보여주었다. 거기다 전근대 일본은 세계적인 은 생산지로서 당시 세계 은 생산의 3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쯤되면 조선이 일본보다 우월한 국가라고 하기 어렵다.

각주

  1. 17세기 부터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왜구가 침입했다 류의 기록이 없다.
  2. 15세기 중반부터 임진왜란까지 대략 150년인데 이 기간동안 일어난 왜변은 10번 이하이다.
  3. 만약 정말로 조선이 500년 내내 왜구한테 시달렸다면 19세기말까지 왜구가 존재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또한 임진왜란 종전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면 조선왕조실록에 임란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는 사건이 기록되었겠지만,실제로는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은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