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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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씨는 중국한국의 성씨이다. 중국, 한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와 북미 등에 약 2941만명이 있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68개의 본관, 644,294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6위이다.

유래[편집]

황(黃)씨는 고대로부터 유래된 성씨로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는 황제(黃帝)의 손자이다.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가 칭(称)을 낳고 칭은 권장(卷章)을 낳았다. 권장(卷章)의 아들 중려(重黎)는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때 화정(火正)의 벼슬에 맡았고 축융(祝融)이라고도 불렸다. 중려(重黎)가 공공씨(共工氏)의 반란을 소탕하지 못하여 그 벌로 죽자 중려(重黎)의 동생 오회(吳回)가 그 후임을 맡았다. 오회(吳回)가 육종(陆终)을 낳았는데 이 육종(陆终)의 아들이 혜련(惠连)이다. 요순(堯舜)시대에 요제(堯帝, 요임금)는 혜련(惠连)에게 홍수를 다스리게 한다.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혜련(惠连)에게 삼호(参胡)지역을 상으로 준다. 삼호(参胡)지역은 현재의 분양(汾阳)으로 산서성(山西省) 서부 태원(太原) 분지 서단의 도시이다. 이 일은 요제(堯帝)가 다스린지 96년째 통치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요제는 삼호의 지명을 황나라(黃國)로 바꾸고, 혜련(惠连)에게 황운(黃云)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하였다.

황씨의 발전과 이주[편집]

기원전 891년, 주효왕(周孝王)은 황운(黃云)의 직계후손인 황희(黄熙, 황석(黄石)이라고도 불림)에게 한수(漢水)의 동쪽지역을 봉토로 주고 후(侯)에 봉했다. 이 곳은 현재의 중국 호북성(湖北省) 양번(襄樊)지역(양양성과 번성) 의성시(宜城市)이다. 이때의 황나라를 서황(西黃)이라고 한다.

기원전 845년, 문후(文侯) 황맹(黄孟 또는 황장(黄璋))이 수도를 의성시에서 황천(潢川)으로 옮겼다. 현재 중국(中國) 하남성(河南省) 남동부(南東部)지방이다. 황씨의 후손들은 기원전 648년 초나라(楚國)에게 멸망될 때까지 황나라를 통치했다. 그래서 초나라에서 많은 황씨들이 벼슬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춘신군(春申君) 황헐(黄歇, 기원전 314년 ~ 기원전 238년)이다. 그는 초나라 재상으로 등극한다. 그는 주변 나라들과 진나라(秦國)의 진출을 막아 제나라(齊國)의 맹상군(孟嘗君), 조나라(趙國)의 평원군(平原君), 위나라(魏國)의 신릉군(信陵君)과 함께 전국4공자(戰國四公子)로 불렸다.

그러나 초나라에 눌러 살지 않은 황씨들도 있었다. 초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목후(穆侯) 황기생(黄企生)은 가까스로 황씨들과 제나라(濟國)로 탈출하였다. 그 후 한나라 시대에 중국 호북성 강하(江夏)로 많은 수의 황씨들이 강제로 이주되었다. 한나라 시대에 유명한 황씨인 황패(黄霸, 기원전 130년 ~ 기원전 51년)는 한나라(漢國) 때 재상이다.

그래서 지금도 강하(江夏)지역에 황강(黄冈), 황파(黄陂), 황매(黄梅), 황석(黄石)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또 다시 많은 수의 황씨들이 양쯔강(長江)남쪽의 만족(蠻族)이 사는 곳으로 이주되었다. 이들 중 귀족가문 황씨들이 원주민과 동화되어 소수황씨만족정권을 많이 세웠다. 예를 들자면 당나라때의 황동만(黄洞蛮)이 유명하다. 이들 황씨만족 중 유족이라는 종족은 베트남으로도 이주하여 현재 베트남 황씨의 유래가 되었다. 기원전 365년 경에는 이들 만족 출신 황씨들이 한반도까지도 이주하였다.


중국 호북성 강하에서 황씨들이 각 지역으로 펴져나갔다고 한다. 진나라(晋朝, 서기 265년 ~ 서기 420년) 때에 북방민족이 중국을 침략하자 황씨들은 복건성(福建省)으로 이주하였다. 당나라(唐朝, 서기 618년 ~ 서기 907년) 때는 복건성에서 광동성(廣東省)과 다른 남부지역으로 이주하여 거대 씨족으로 발전하여 현재 남중국의 3대 성씨가 되었다.

대만으로의 이주는 명나라와 청나라시대에 시작되었고, 정성공(鄭成功)이 반청기치를 앞세워 대만해협을 건널때 많은 수의 황씨들이 대만으로 이주하였다.

황씨들이 동남아시아에 최초로 이주한 기록은 황삼병(黄森屏)이 1375년에 브루나이에 이주한 기록이다.

황씨들의 미국으로의 이주는 19세기 중반의 서양열강의 강제적인 중국항구 개항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중국의 황(黃)姓[편집]

중국 국가 통계국의 2010년 제6차 전국인구일제조사(第六次全國人口普查)에서 황(黃, Huang) 성은 약 2,680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중국 성씨 인구 순위 8위이며, 중국 인구의 2.23%를 차지한다. 특히 광둥 성에서는 19%가 황씨이다.

한국 황씨의 유래에 관한 전설[편집]

조선 후기 정시술(丁時述)이 저술한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라는 문헌에 따르면, “후한(後漢) 광무제의 무신(武臣) 구대림(丘大林)과 문신(文臣) 황락(黃洛)이 교지국(交趾國)에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평해(平海)에 표류하였는바 황락이 그곳에 거주하여 황씨(黃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육종(陸終)의 후예(後裔) 중에 해(海), 락(洛), 호(湖) 3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둘째인 황락(黃洛)은 중국 후한 유신이었다. 서기 28년(후한 광무제 건무 4년, 신라 유리이사금 5년) 구대림(丘大林, 평해 구씨의 시조)장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 지금의 베트남)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길을 잃고 망망대해를 헤매던 중, 신라의 동북 해변인 평해읍 월송리 굴미봉(崛尾峰) 남쪽 기슭 월송봉(越松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황락(黃洛)은 신라에 귀화함으로써 평해에 정착하여 한국 황씨의 도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평해(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越松) 지역에는 황장군의 묘가 있고, 함께 신라에 온 구(丘)장군이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후대로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 삼형제가 있었는데

그러나 평해 구씨 측에서는 구대림이 한반도에 동래한 것은 663년(신라 문무왕 3년)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하여 황씨 측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 문헌(文獻)은 모화사상(慕華思想)이 극에 달했던 조선 후기(後期)의 저술로 추정할 뿐 작자와 연대가 미상이고, 내용이 황당하여 이를 하나의 전설로만 생각할 뿐이다.

본관별 시조[편집]

  • 평해 황씨(平海黃氏)는 고려 때 금오위장군 태자검교를 지낸 황온인(黃溫仁)을 1세조로 한다. 2000년 인구는 137,150명이다.
  • 장수 황씨(長水黃氏) 시조 황경(黃瓊)은 통일신라 경순왕의 부마로 시중을 지냈다. 조선 세종영의정을 지낸 황희의 증조부 황석부를 1세조로 한다. 2000년 인구는 146,575명이다.
  •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고려 충혜왕으로부터 공민왕까지 5대에 걸쳐 벼슬을 하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낸 회산군(會山君) 황석기(黃石奇)를 파조로 하는 공희공파(恭僖公派), 시중을 역임한 황충준(黃忠俊)을 파조로 하는 시중공계, 황양충(黃亮沖)을 파조로 하는 호장공계의 3파가 있다. 2000년 인구는 252,814명이다.
  • 제안 황씨(齊安黃氏) 시조 황을구(黃乙耉)는 창원 황씨 공희공파 파조인 황석기(黃石奇)의 5세손이다. 황을구가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소윤과 이조 참의 를 역임한 후 훈공을 세워 조선 태종 때 제안군에 봉해졌다. 제안은 현재의 황해도 황주군 제안리 일대이다. 2000년 인구는 2,752명이다.
  • 우주 황씨(紆州黃氏) 시조 황민보(黃旻甫)는 우주에 토착한 사족의 후손으로 중윤(中尹)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황공세(黃公世)는 검교신호위대장을 역임한 후 우주에 세거하였다. 그 후 10세손 황거중(黃居中)이 조선개국 원공공신으로 공조전서를 역임하고 우주에 낙향하여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우주로 하였다. 우주는 전라북도 전주시의 별칭이다. 2000년 인구는 19,967명이다.
  • 회덕 황씨(懷德黃氏) 시조 황윤보(黃允寶)는 고려 때 지문성 부사를 거쳐 호부전서에 이르렀고 좌명공신으로 회천군에 봉해져서 황윤보를 1세조로 한다. 회덕은 대전광역시의 옛 지명이다. 2000년 인구는 7,393명이다.
  • 황주 황씨(黃州 黃氏)의 황주량(黃周亮)은 1004년(목종 7)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어사중승(御史中丞)·호부상서 등을 거쳐 1034년(덕종 3) 정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고, 참지정사(參知政事)·문하시랑평장(門下侍郎平章事)를 역임하였다. 1043년(정종 9) 추충진절문덕광국공신(推忠盡節文德匡國功臣)으로 특진, 수태보 겸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한림원과 사관(史館)의 요직을 역임하며 세 차례나 지공거(知貢擧)를 맡기도 하였고, 거란과의 전쟁 후에는 『칠대실록(七代實錄)』36권을 주관하여 편찬하였다.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재임시 이가도(李可道) 등을 도와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았다. 사후 정종묘정(靖宗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황주량 이후 세계를 알 수 없어, 조선(朝鮮)시대 부사(府使)를 역임한 황응성(黃應星)을 1세조로 한다.
  • 상주 황씨(尙州黃氏)는 고려 때에 벼슬이 상주국(上柱國)에 이른 황석주(黃石柱)를 1세조로 하고 있다. 2000년 인구는 7,031명이다.
  • 덕산 황씨(德山黃氏)의 시조 황언필(黃彦弼)은 고려 때 도첨의정승을 지내고 덕풍군에 봉해졌다. 상계가 실전되어 장흥고사를 지낸 황재(黃 載)를 1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2000년 인구는 3,364명이다.
  • 항주 황씨(杭州黃氏)의 시조 황공(黃功)은 명(明)나라 항주(杭州) 출신으로서 기산 지휘사ㆍ중도유수 등을 지내고, 1645년(인조 23) 명나라가 망하자 심양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에 귀화했다. 그후 후손들은 경기도(京畿道) 가평군 하면 마일리에 정착 세거하면서 선조의 출신인 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2000년 인구는 402명이다.

역사 인물[편집]

근현대 인물[편집]

관련 문서[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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